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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라틴어: Imperium Romanum 임페리움 로마눔[*] 고대 그리스어: Βασιλεία τῶν Ῥωμαίων)은 지중해를 중심으로 유럽, 북아프리카, 서아시아 등지를 다스린 제국이다.
로마 제국은 기원전 27년 아우구스투스가 사실상 공화정을 폐지하면서 등장하였고, 이후 3세기의 군인황제시기까지는 여러 속주들을 통합한 형태의 원수정이었으며 이탈리아 반도의 로마를 유일한 수도로 두고 있었다. 그러나 군인황제시기에 이르자, 여러 장군들이 황제를 자칭함에 따라 로마 제국은 밀라노와 라벤나 등지에 수도를 둔 서로마 제국과 니코메디아와 안티오크, 콘스탄티노플 등에 수도를 둔 동로마 제국으로 나뉘어졌다. 로마는 476년까지 서로마와 동로마의 공식 수도였으나, 오도아케르가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를 퇴위시키고 야만족들이 이탈리아 반도에 자치 왕국들을 세우자 콘스탄티노플이 로마 제국의 유일한 수도로 남게 되었다. 서로마 제국이 게르만족에게 망한 이후, 동쪽의 동로마 제국은 점차 그리스화되기 시작하였으며 이를 기점으로 고대 로마가 끝나고 중세가 시작된 것으로 본다.
로마 제국의 전신은 기원전 6세기경 왕정을 몰아내고 세워진 로마 공화정이었다. 그러나 로마의 공화정은 여러 차례의 내전과 전쟁을 거치며 불안정해졌고, 기원전 1세기에는 뛰어난 장군인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등장하면서 거의 명맥이 끊겼다. 카이사르는 독재관으로 취임하여 1인 독재 구조를 굳혀나갔으나, 기원전 44년 즈음에 공화파에 의해 살해당했다. 카이사르 사후에는 그의 양자인 아우구스투스가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상대로 한 악티움 해전에서 기원전 31년에 승리하였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정복하는 데에 성공했다. 이후 로마의 원로원은 기원전 27년에 아우구스투스에게 '프린켑스', 즉 로마의 제 1시민이라는 칭호를 수여하였고, 아우구스투스는 사실상의 황제로 즉위하여 군림하였다.
아우구스투스 이후 약 200여 년 동안 로마 제국은 기나긴 평화를 맞았다. 이를 팍스 로마나라고 칭한다. 로마 제국은 트라야누스 황제 시기에 최대 판도를 이룩하였으며, 전 지중해 세계를 통합하면서 선진 문명을 유럽 각지에 전파하였다. 허나 이러한 번영기도 점차 끝났고, 제국은 콤모두스 황제 시기부터 불안정해지기 시작하더니 3세기에는 군인들이 서로 황제를 칭하고 각지에서 갈리아 제국과 팔미라 제국 등이 로마에 반기를 들며 완전한 혼란기로 들어섰다. 이후 아우렐리아누스 황제가 제국의 재통일에 성공하였으며, 후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제국을 더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하여 제국을 서부와 동부로 나누었다. 313년에는 로마 제국에서 밀라노 칙령을 반포하면서 기독교가 빠르게 세를 불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북방의 야만족들이 대거 훈족을 피해 로마 제국 서부의 국경 내부로 도망쳐 들어오면서 서로마 제국이 급격히 불안정해지기 시작하였다. 결국 게르만족 출신의 오도아케르가 서로마의 아우구스투스 로물루스를 폐위시켰고, 당시 동로마 제국의 황제였던 제논은 480년에 공식적으로 서로마 제국을 폐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유럽의 지배자들은 종종 정통성과 권위를 빌리기 위하여 서로마 제국의 후계자를 자칭하는 경우가 잦았는데, 가장 대표적인 예가 신성로마제국이었다. 아무튼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후에도 동로마 제국은 약 1,000여 년간 지속하며 번성하였는데, 전성기에는 옛 로마 제국의 영토 상당수를 회복하며 힘을 과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동로마 제국도 시간이 흐르자 무너졌고, 1453년에 오스만 제국의 메흐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며 동로마 제국도 끝끝내 멸망하고 말았다.
로마 제국이 워낙 방대한 영토를 지배했으며 오랫동안 번성했기에, 로마의 문화는 유럽과 아프리카, 중동 각지에 퍼지며 후대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언어, 종교, 예술, 건축, 철학, 법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로마의 입김이 미쳤으며, 특히 로마에서 사용되던 라틴어는 로망스어로 분화되며 유럽 거의 대부분의 권역에서 사용되게 되었다. 한편 제국의 국교로 채택한 기독교는 로마 가톨릭과 동방정교 등으로 나누어지며 전세계로 퍼져나갔고, 현재 세계 제 1의 종교 지위를 차지할 정도로 그 영향력이 크다. 로마의 건축도 오랫동안 영향을 주었는데, 로마네스크 양식, 르네상스 양식, 신고전주의 양식 등이 로마의 영향을 받았으며 심지어 이슬람 건축 양식도 로마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또한 로마의 체계적인 법률은 후대에까지 널리 이어지며 나폴레옹 법전, 미국 헌법 등에 계승되었으며 전세계 민주주의의 근간을 이루며 널리 사용되었다. 악티움 해전은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패배로 끝났다. 로마의 유일한 최고 권력자가 된 옥타비아누스는 군사, 재정, 정치 전반에 걸친 대규모 개혁에 착수하였다. 기원전 31년 안토니우스를 제거한 옥타비아누스는 원로원에 의해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뒤를 이어 종신 독재관직에 올랐다.
옥타비아누스는 내전 당시 제거된 귀족들의 직위를 지방 출신 관리들로 충원하였다. 또한 이들이 원로원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길도 열어주었다. 기원전 29년, 옥타비아누스는 감찰관에 선출되었다. 기원전 27년에 옥타비아누스는 내전이 끝났으므로 자신에게 위임된 비정규 특권을 원로원과 로마 시민에게 반납하겠노라 선언하였다.[1] 이로써 로마는 다시 이전의 공화정 시절의 정치 체제로 돌아간 것처럼 보였다. 로마 원로원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존엄한 자"를 뜻하는 칭호인 '아우구스투스'를 수여한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는 여전히 집정관이었고, 원로원은 아우구스투스가 갖고 있는 금화, 은화 발행권을 되찾아 올만한 힘이 없었다. 또한 직접 속주를 다스리고 군대를 이끌지는 않았지만, 아우구스투스는 여전히 군대의 높은 지지를 얻고 있었다. 또한 아우구스투스의 후원에 힘입어 출세한 많은 지지자, 피호민, 또 그가 가진 어마어마한 부는 로마의 그 누구와도 비교할 바가 되지 못했다.
원로원은 전과 다름없는 위엄과 권한을 지닌 듯했으나 실권은 없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실질적으로 군사와 재정을 장악하고 있었으며, 특히 원로원 의원직을 자기 마음대로 임명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원로원을 전통과 여론을 대변하는 기관으로서 존중했고, 원로원에 정책 자문을 구했다. 마찬가지로 그는 정무관을 임명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원로원을 존중해 원로원 의원과 기사 계급으로 이루어진 특별 위원회가 법무관과 집정관을 뽑게 했고, 켄투리아회는 이를 자동적으로 승인케 하였다.
이전 속주들은 원로원이 통제했으나, 편입한 지 얼마 안 되는 그 밖의 속주들은 황제가 통제했다. 황제는 그가 통제하는 속주에 군대를 주둔시켰고 속주 총독직에는 원로원 의원뿐만 아니라 기사 계급도 임명했다. 속주는 직접세와 간접세를 로마에 바쳤으나 기본적으로는 각각 자체의 민회와 시 의회, 관리를 거느린 나라(Civitas)를 단위로 자치가 이루어졌다. 속주에 파견된 관리의 수준이 높아졌고 감독이 강화되었으며 평화가 정착되어 더 나아졌고 로마 시민권을 받으면서 자치 도시로 승격되었다.
이러한 평화에 대해 많은 사람이 아우구스투스와 그의 가문을 숭배함으로써 감사를 표시했다. 그러나 그의 실질적인 권력기반은 바로 그에게 개인적인 충성을 서약한 군대였다. 군대는 군단·보조부대·근위대·해군으로 이루어졌다. 아우구스투스 치세에 황실 근위대의 병사는 대개 이탈리아인이었으나, 많은 군단과 거의 대부분 보조부대의 병사는 주로 황제가 다스리는 서부 속주 출신이었는데 이러한 추세는 점점 더 증가했다.[모호한 표현] 그러나 군단은 입대하는 날로, 보조부대는 제대하는 날로 시민권을 얻었고[모호한 표현], 더구나 보조부대에서 제대한 병사들은 종종 그들이 주둔했던 속주에 정착했으므로 이는 제국 전역을 로마화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그는 많은 지역을 정복했으나 로마화가 비교적 쉬운 지역만을 속주로 병합해 도로를 건설하고 역참(驛站)제도를 시행한 반면, 대아르메니아 왕국과 같이 로마화가 어려운 지역은 위성국가로 만들어서 방어에 따르는 비용을 줄였다. 그러나 영토를 확장하는 더 쉬운 방법으로 전쟁보다는 위성국가를 만든 뒤 속주로 병합하는 경우(예:카파도키아, 트라키아 왕국 등)도 있었다.
그러나 로마에서는 제위 계승의 원칙이 없었기 때문에 아우구스투스는 일찍부터 후계 문제에 관심을 두었다. 군대는 부자상속에 정통성을 두었으므로 그는 왕조를 세우려 했으나 그에게는 아들이 없었고 가까운 친척들도 그보다 먼저 죽었다. 결국 그는 어쩔 수 없이 티베리우스를 양자로 삼아 후계자로 지명하고 호민관의 권한을 주었다. 서기 14년 아우구스투스가 죽은 뒤 티베리우스가 자동적으로 제위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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