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이 있는 관상은 어떤 얼굴인가 마의천 산세형성과 인물판단 호남인 영남인 충청인 경기인 강원인

6 years ago

택리지를 통해본 淸潭 李重煥임 종 옥

팔도총론(八道總論)

국토를 생활권 단위로서 지역 구분할 때 가장 중요한 지표로서 생각한 것이 바로 산줄기였다. 각 지역들은 하천을 통해 동일한 생활권으로 연결되지만 분수령이 되는 산줄기들은 이 하천 유역권을 구분짓는 경계선이 되기 때문이다. 이중환은 백두대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산줄기를 중심으로 우리 국토를 체계적으로 파악하였다. 이미 고려 말의 문헌에서부터 우리 국토의 산줄기들을 백두산에서 기원하는 것으로서 인식하고 있었지만, 국토 전체의 산줄기들의 배열을 체계적으로 파악한 것은 이중환에 이르러서부터일 것이다. 그 후의 저작들과는 다소 차이가 나지만, 그는 산경표(山經表)와 유사한 산지 분류 체계를 제시하였다. 그는 산들을 일일이 열거하거나 산줄기들의 이름을 붙이지는 않았지만, 산경표의 임진북예성남 정맥을 제외한 1대간 1정간 12정맥을 분명히 제시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산줄기들을 문화권 단위의 지역 경계로 인정할 때 논란이 되는 부분들이 있다. 해서정맥의 경우 산경표에서는 장산곶에서 끝나는 것으로 제시되어 있는데, 이는 대동강과 재령강 중심의 수계를 구분짓는 선으로서나, 실제 산지 배열을 표현하는 선으로서도 부적절하다. 그런데 이중환은 바로 이 해서정맥을 구월산으로 연결시켜 파악하고 있다. 그는 산경표의 낙남 정맥을 희미하게 암시만 할 뿐인 데 비하여, 호남 정맥은 기맥을 상세히 설명하여, 산경표에서는 제외시킨 무등산 - 월출산 구간을 포함시켜 광양의 백운산으로 연결하여 제시하고 있다. 금북정맥의 경우도 태안과 서산으로 이어지는 선뿐만 아니라, 임천과 한산으로 이어지는 부분을 언급하여 금강 유역권을 뚜렷하게 부각시키고 있다. 산줄기들을 이처럼 인식한 바탕 위에서 그는 지역의 경제활동, 역사와 문화를 고찰하였다. 예컨대 민속이 거의 같은 내포 동쪽의 7읍들의 경우 금북정맥 이북에 해당하며, 풍속이 대체로 같다고 한 재령강 유역의 8읍들은 바로 해서정맥 이북으로서, 생활양식이 동일한 등질 지역을 구분짓는 선이 바로 산줄기임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중환이 산줄기나 하천을 중심으로 국토를 파악한 것은 전통 사회의 생활양식이란 바로 자연과의 조화 속에서 형성된 것으로, 자연 지역과 문화 지역이 서로 깊은 관련성을 지닐 때가 많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주목한다면 이중환이 국토 편력을 통하여 여러 지방의 경관 변화를 관찰하면서 우리 고전에서는 보기 힘든 문화생태학적 사고를 보여 주었다는 점이 결코 우연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중환 역시 풍수적 사고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었으나, 이에서 나아가 인위적인 환경 파괴와 이로 인한 지형 변화 과정에 대한 관찰을 통하여 자연 재해의 원인을 분석, 파악하였다. 그는 전국적인 인구 증가에 따른 경지 확장과 이로 인한 산지의 황폐화를 주목하여, 임상의 파괴로 인하여 발생하는 토양 침식이 하천에 미치는 영향을 관찰하였다. 황폐된 임야에서는 토양 침식이 왕성하게 일어나고, 이 토양은 강을 타고 하류로 운반되어 하상에 퇴적되기 때문에 강의 수심이 얕아지게 된다고 추론하였다. 이로 인하여 한강 하구로부터 마포, 용산에 이르는 수로가 토사로 매몰되어 수심이 얕아지고 결국은 조수가 미치지 못하므로 선박의 통행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여행과 답사의 차이가 어디 있을까? 아마도 한 지역에 대한 주관적 인상과 객관적 관찰의 차이일 것이다. 이 점에서 이중환은 다른 문헌에서는 보기 힘든 생태학적 관찰을 기록으로 남겼으며, 우리는 대지에 뿌리내린 그의 국토 인식을 신뢰하게 된다.
이러한 국토 인식의 바탕 위에서 그는 이상적인 가거지의 요건으로 지리(地理), 생리(生利), 인심(人心), 산수(山水)를 들었다. 여기서 지리란 풍수에서 말하는 양택(陽宅)으로서, 그는 수구(水口), 야세(野勢), 산형(山形), 토색(土色), 수리(水理), 조산조수(朝山朝水)의 조건을 제시한다. 생리와 인심은 경제적, 사회적 입지 조건을 뜻한다. 그는 자연적 조건인 산수를 논의하면서, 사회가 혼란할 때 사대부가 숨어 살 만한 곳을 피세지(避世地), 난을 피할 수 있는 곳을 피병지(避兵地), 평시나 전란시에 다같이 살 만한 곳을 복지(福地), 길지(吉地) 또는 덕지(德地)로 구분하여 제시하였다. 그렇지만 가거지 가운데 가장 좋은 곳을 계거(溪居)라 하고 강거(江居)를 그 다음으로 보았으며, 해거(海居)는 가장 환경이 열악한 곳으로 평가하였다. 이중환이 이렇게 계거를 사대부들의 거주지로서 가장 적합하다고 본 것은 자족적 농업 사회의 성격을 반영한 것일 뿐 아니라, 유교 문화의 자연관을 표현한 것이다. 시냇가에 주거를 마련한다면 우선, 사대부들이 유교문화에서 요구하는 예의(관혼상제)를 유지할 수 있는 적당한 규모의 경지, 즉 경제적 기반을 지닌 중소지주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시냇물이 흐르는 깊은 골짜기의 조용하고 아름다운 자연 환경은 자연과 일체되어 스스로를 완성하려는 사대부들에게 학문과 수양의 장소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계거는 지형적으로 범위가 넓지 않기 때문에 촌락의 입지로는 적당하나 도회가 발달할 만한 곳은 아니었다. 반면에 강거는 들이 넓게 열리고 하천을 이용한 수운이 편리하며 많은 도로들이 결절하므로 교역이 발달하게 된다. 그러므로 강거는 각종 물산이 집산하는 도회를 이루는 경우가 많다. 평양, 충주 등의 명도(明都)는 대부분 강을 끼고 발달하였으며, 강경, 송파 등 주요 상업 취락들 역시 강변에 입지하였다. 이중환의 관심이 전통적인 사대부들의 가거지를 추구하는 것이었다면, 강거에 대해서 더 이상 고려할 필요가 없었으리라.
팔도총론에서 저가 읽은 내용 중 감명 깊은 부분을 소개하면, 황해도 장연부에, 모래 속에서 해삼이 나는데 모양이 방풍 같다. 해마다 4, 5월이면 중국 산동성의 등주와 내주에서 배를 타고 오는 자들이 매우 많다. 관가에서 장교와 아전을 보내 쫓으면 바다로 나가 닻을 내리고 있다가, 사람이 없어지기를 기다려 다시 언덕에 올라와서 해삼을 잡아간다는 내용은 지금의 한․일, 한․중의 어업 분쟁을 다시 한번 되새기게 하는 부분이다.
장산곶 아래 바다에서는 또 복어와 흑충이 잡힌다. 여기서 흑충이 지금의 오징어란 사실은 택리지를 읽지 않았다면 알 수 없는 일이다.
강원도 산천의 변화에서, 옛날 나의 선친께서 계미년에 강릉부사가 되어 가셨는데, 그때 내 나이 열넷이었다. 가마를 따라 가는데, 윤교에서 강릉부 서쪽에 있는 대관령에 이르기까지 평지거나 높은 고개거나 가릴 것 없이 모든 길이 나무 빽빽한 숲 속에 있었다. 나흘 동안 길을 가면서 하늘의 해를 쳐다보지 못했었다. 그런데 몇십 년 전부터 산과 들이 모두 개간되어서 농사터가 되고, 마을이 서로 잇닿아 산에는 한 치 굵기의 나무도 없게 되었다. 이를 미뤄보면 다른 고을도 마찬가지임을 알 수 있다. 예전에는 인삼 나는 곳이 모두 대관령 서쪽 깊은 두메였는데 산 사람이 화전을 일구느라고 들판에 불을 질러 인삼이 차츰 적게 산출된다. 장마 때마다 산이 무너져 모래가 한강으로 흘러드니, 한강 물이 차츰 얕아지고 있다.
이 내용은 인간에 의한 자연의 무분별한 개발에 경종을 울리는 내용이며 지금의 문화생태학에 해당하는 부분이라 하겠다.
경상도 동래부와 대마도에서, 왜국은 온 나라에 장독이 있는 샘이 많아 풍토병이 있는데,인삼을 물대접에 넣으면 탁한 장기가 녹아 없어진다. 그러므로 인삼을 가장 귀하게 여긴다. 먼 데 있는 왜인은 모두 대마도에 와서 구해 가는데, 우리 조정에서는 해마다 일정한 수량만큼 하사하고, 사사롭게 사고 파는 것은 엄금한다. 그러나 워낙 이익이 많으므로, 밀매하는 자를 비록 죽인다 하더라도 완전히 금할 수는 없다. 근래에는 금령이 차츰 느슨해져서 법을 어기는 자가 많아졌고, 우리나라의 인삼값도 나날이 오르게 되었다는 내용은 우리나라 인삼이 예나 지금이나 세계가 알아주는 약효를 가졌다는 사실에 자못 흐뭇한 느낌이 든다.
전라도 광주목에는, 명나라 장수 진린(陳璘)이 군사를 이끌고 바다 위에 머물러 있었는데, 병신․정유년 사이에 왜적 수군이 바닷가 여러 고을을 잇달아 쳐들어왔지만 순신이 바다에서 잘 싸워 여러 번 왜적을 쳐부쉈다. 왜적의 목을 노획하면 번번이 璘에게 넘겨주어, 그로 하여금 공을 아뢰게 하였다. 그는 크게 기뻐하여 우리 조정에 편지를 보내며, 통제사는 천하를 경륜할 만한 재주가 있으며, 나라와 임금에게 끝없는 공을 세웠습니다. 라는 내용은 이순신 장군의 나라 위한 마음을 다시 한번 짐작케 하는 부분이다.
경기도 개성부에는, 태조가 공양왕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고, 도읍을 한양으로 옮겼다. 왕씨의 신하로서 대대로 높은 벼슬을 했던 큰 집안들 가운데 태조에게 신하로 복종하지 않으려는 자들은 모두 개성에 남고 따라가지 않았는데, 태조가 그들을 미워하여 개성 선비에게는 100년 동안 과거를 보지 못하도록 명하였다는 내용은 개성에 남아서 살던 자의 아들과 손자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평민이 되어, 장사를 생업으로 삼고 개성상인이란 말이 이 지역을 대표하는 유래를 만들게 된 것으로 생각이 든다.
팔도의 기술은 평안도부터 시작하여 함경도․황해도․강원도․경상도․충청도․경기도의 순으로 배열하였다. 왕도 한양을 별개의 단락으로 두지 않은 점이 특이하며, 각 지방을 서술하면서 한양과의 정치․경제․문화적 관계를 간접적인 방법으로 강조하는 독특한 방법을 취하고 있다. 그리고 팔도의 위치와 그 역사적인 배경을 간략하게 요약하여 경상도는 변한과 진한의 땅이고, 함경도․평안도․황해도는 고조선과 고구려, 강원도는 예맥의 땅임을 밝히고 있다. 사대부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표현하고 있으며, 사대부의 기원과 역사적 변천을 언급하고 있다. 도별로 서술한 지지에서는 도 전체의 위치와 자연을 서술한 뒤 간략하게 자연환경․인물․풍속 등을 전체적으로 언급한 뒤, 소지역으로 나누어 읍치 중심으로 지리․역사․생업․경치 등을 종합적으로 다루고 있다. 도내의 2차적 지역 구분에서는 하천과 산맥을 경계로 하고 있다. 평안도에서는 청천강을 경계로 청북과 청남, 황해도에서는 멸악산맥을 경계로 이북과 이남으로 구분하였다. 충청도에서는 차령산맥을 경계로 남북을 나누고, 차령 이북은 경기도에 가깝고 남쪽은 전라도에 가깝다고 서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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