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주의와 전염병, 짐 다운스, 카보베르데, 황열병, 죄수선, 넵튠호, 남아프리카공화국, 희망봉, 사이먼스만, 정육점, 케이프식민지, 영국, 죄수유형지, 반밤죄자협회, 호주

2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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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혼잡한 공간들: 노예선, 감옥 그리고 신선한 공기·17
2 누락된 사람들: 전염 이론의 몰락과 역학의 부상·57
3 역학의 목소리: 카보베르데의 열병 추적·83
4 기록관리: 대영제국의 역학·113
5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크림전쟁과 인도에서 전염병과 싸운 숨겨진 역학자·141
6 자선에서 편견으로: 미국위생위원회의 모순적인 임무·183
7 ‘묻히지 못한 자들의 노래’: 노예제, 남부연합, 역학 연구·219
8 이야기 지도: 흑인부대, 무슬림 순례자, 1865~1866년 콜레라 대유

엄마 손을 잡고 흙먼지 날리는 큰길로 접어든 흑인 아이는 왈칵 닥쳐온 두려움에 눈물을 훔쳤다. 앞쪽 히코리 나무 아래 백인 남자 두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노예인 두 모자母子의 소유주와 의사였다. 소년이 도착하기 무섭게 의사는 가느다란 아이의 팔뚝을 날카로운 칼로 찔러 상처를 내고는 준비해온 천연두 ‘딱지’를 피가 나는 살갗 안으로 밀어 넣었다. 천연두로부터 아이를 보호하려는 게 아니었다. 오염 안 된 아이의 몸을 이용해 다량의 ‘깨끗한 백신’을 얻어내기 위해서였다. 남북전쟁은 발발했고 전장에서는 예상치 못한 적이 출현한 상태였다. 천연두였다. 에드워드 제너가 백신 접종법을 개발한 후였지만 무섭게 퍼지는 질병을 감당할 물량은 턱없이 부족했다. 위기상황에서 남군의 의사들은 퇴행적인 대안을 떠올렸다. 인두법이었다. 백신 채취에 사람을 이용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다행히 그들에게는 제약 없이 사용해도 좋은 깨끗한 몸이 있었다. 어린 흑인 노예들이었다. 심지어 의사들은 엄마 품에 안긴 영유아에게까지 손을 뻗쳤다. 그 작은 몸이 바이러스와 싸우느라 고열로 신음할 때, 의사들은 백신이 안정적으로 만들어지고 있다며 미소를 지었다. 진통을 겪으며 고름을 만들어낸 아이의 온몸에는 평생 갈 흉터와 파인 자국이 남았지만, 그들이 알 바가 아니었다. 기록이나 장부에도 실리지 않은 탓에 남북전쟁을 연구하는 후대의 역사학자들조차 노예의 아이로 태어난 수많은 생명이 세상에 나와 처음 수행한 노동의 실체를 제대로 알아챌 수 없었다.

“현재 우리의 건강은 이름 없는 조상들의 피와 고통에 너무나 많은 것을 빚지고 있다.”

의학은 18~19세기에 광폭으로 발전했다. 번성하는 제국주의의 관료체계 덕에 전 세계로 파견된 의사들은 시시각각 닥치는 의학적 위기에 대처하는 과정에서 연구자로 변모했다. 넘치는 열정으로 유행병을 관찰하고, 감염자와 사망자 수를 세고, 주변 환경과 질병의 상관관계를 분석했던 그들은 동료들과 열띤 토론을 벌이며 새로운 이론을 만들어냈다. 사례연구와 통계분석에 근거해 질병을 파악하고 예고하는 역학疫學 역시 이 시기에 탄생했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공중보건의 시대가 첫발을 뗀 것이다.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그 시기 의사들이 대규모 임상을 진행하고, 예후를 관찰한 대상은 누구였을까? 당대 의학 혁명을 이끈 학자나 이론이 의학사의 중요 페이지를 차지하는 것과 달리, 사례연구 현장에 관한 이야기는 말끔히 사라졌다. 이 책 《제국주의와 전염병(원제: Maladies of Empire》은 바로 그 현당, 의학 발전에 결정적으로 기여했지만 기록이나 기억에서 삭제되어 버린 이들의 목소리를 어렵사리 발굴해낸 역작이다. 당대 기준과 권력의 그늘에서 억압받았던 사람들의 삶을 재조명해 기존 역사 기록의 빈자리를 채워 넣고 있는 짐 다운스는 이 책에서 18~19세기 제국주의 시대 흑인과 혼혈인, 노예와 식민지 피지배인, 죄수와 군인들이 전염병 연구 및 역할 발전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현미경을 들이대듯 상세하게 이야기한다. 예속된 사람들의 강요된 희생과 가슴 아픈 삶이 근현대사의 거대한 물줄기와 어떻게 맞물리는지 찬찬히 파고드는 이 책은 팬데믹 시대를 건너는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현실의 속살, 잘 포장된 외피 아래 우리 삶이 놓인 진짜 자리를 새로운 눈길로 들여다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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